사는 건 정말로 괴롭다.
나는 (아마도) 유달리 감정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 번 괴로운 일이 벌어지면 그 감정적 침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이고 그 우울에 잠겨 몸서리치고는 하는 것이다. 인생에 불쾌한 경험은 끝이 없으므로, 과장하자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끝이 없는 불행에 담긴 채 보내고 있다.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삶이자 고통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만.
결론적으로, 죽음을 수동적인 도피처로 여기는 것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힘듦과 어려움을 피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이 것을 삶의 괴로움에 대한 대처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고통에 대한 '수동적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고통을 외면할수록, 이 고통은 이자까지 붙은 채 미래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먼 미래에 다가올 고통은, 나이와 기회의 결핍으로 인하여, 더는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질척한 괴로움으로 눌어붙기에.
수동적인 태도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왜 지금 당장 죽지 않는가,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로 뒤로 미룰수록 선택의 영역을 벗어나며, 삶의 어려움을 나중으로 미루면 해결될 것이라는 태도나 죽음의 고통을 나중으로 미루면 해결될 것이라는 행동은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고통에서의 도피에 불과하다. 삶이건 죽음이건 모두 하나로 괴로운 이상, 괴로움으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핑계를 대며 도망치더라도 같다.
따라서, 죽음 찬미 혹은 삶의 부정은 그 반대항, 치열한 삶, 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적극적인 태도로서만 긍정될 수 있다. 치열한 죽음.
삶의 괴로움에 스스로를 내던지거나, 죽음의 아픔에 스스로를 밀어라. 일단 태어남 당한 이상 괴로움은 피할 수 없으며, 그 끝이 삶이라도 죽음이라도 마찬가지다. 삶도 죽음도 모두 하나로 아플 뿐이다. 아프지 않은 삶과 죽음은 없기에, 안타깝게도, 태어남의 피해자인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겪어야만 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죽는 사람을 옹호한다. 고통을 피하지 않는 사람의 용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회피도 아니고, 핑계도 아니고, 미루는 것도 아니고, 온 힘을 다해 아픔에 몸 던지는 태도로서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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